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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도 하이파이가 만들어지기까지..

1, 탈출


집에서 탈출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초등학교 6학년때 몰래 신문을 돌리다
두달도 채 못해 들켰다.
필자가 태어날때만 하더라도 춘천의 동네에서는 부족하지 않은 집안이었다.
다른집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는 TV도 있었고 독수리표 전축도 있었다.
클래식 음악을 유난히 좋아하시던 어머니덕에 어려서부터 많은 음악을 들었다.
하지만 6살 되던해에 교사직을 하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집안은 급격한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때 어머니 나이는 너무도 젊은 39세 였다.
그후 집안에서의 냉대, 학대, 무관함 등은 필자를 탈출하게 만든 동기로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탈출계획을 잡았다.
하지만 그나마 필자를 잡아주고 있던 것이 음악이었다.
그 중에서도 라디오를 많이 들었는데 일찌감치 독수리표 전축은 수명을 다했고
(필자가 아주 조금 건드렸다) 휴대용 라디오는 건전지 살 돈이 없어서 라디오를
듣지 못하게 되자 금단현상이 생기기 까지 했다.
믿지 않겠지만 필자는 초등학교 후반부터 소위 놀았다 라는 생활을 시작했다.
조직에서 NO.2 자리를 맡아 바람직 하지 못한 비자금을 만들었는데 나이 때문에
관리를 못하고 바로바로 돈세탁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것이 필자가 오디오를 시작하게 되는 동기가 될줄은 미쳐 몰랐다.

2,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다.


비자금은 대부분 조립식 프라모델의 지출로 들어갔다.
태엽의 시대를 지나 나름대로 이제 머리가 컸다 하여 모터시대를 만난다.
중학교 올라가던 해에 모터를 돌릴만한 에너지(밧데리)가 없어서 제 2의 에너지
필요성을 대단히 느꼈다.
그래서 계획한 것이 독수리표 전축 내의 전원을 끌어 쓰자는 것이었다.
집안에 아무도 없는 틈을타 전축의 뱃속을 열었다.
배선이 많다.
어떤색의 선을 잘라 끌어다 써야하나.....
손에는 식은땀이 나고 결굴 많은 선들중 하나를 선택해 모터에 연결했다.
하지만 모터는 삐삐가 진동하듯 울기만 했고 돌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원인을 찾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때 건전지(DC)와 내부에
흐르선 전류의 존재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고 나름대로 전축 내부의 부품을
뜯어가며 결국 완벽하지는 않지만 모터를 돌리는데 성공했다.
후에 알았지만 필자가 만든 것이 반파 정류회로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축은 소리가 나지 않았고 그 끝은 또 하나의 좋은 고통속의 경험이 되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했던가 ....
그해 여름 우리집에 결국 형사가 찾아왔다.
우리 조직의 끝은 거기까지 였고 필자도 마음을 바로잡아 나라에 충성하고 바른 길로
가겠다는 결심을 했다.
마침 중2 과학의 날을 맞아 무료로 과학관 주체로 AM 6석 라디오 킷트를 희망자에
한해 무료로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생각은 하나였다.
내가 이 라디오를 만들면 우리 형제들은 다시 라디오를 들을 수 있다 라는.....
열심히 만들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
아마 여기서 소리가 났으면 필자의 오디오 인생은 여기서 끝났을지 모른다.
이것저것 만지다 한달여 후에 결국 동네 전파사를 찾았다.
거금 천원을 주고 수리를 했는데 신기하게도 소리가 났다.
그때를 기억한다.
그 수리기사 아저씨가 너무나도 위대하게 보였음을....

그후 필자는 있는돈 없는돈을 모아 킷트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집에서는 필자의 이런 행동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긴 무엇을 해도
관심이 없었는데 이런 것이 필자가 오디오를 하는데 겨론적으로 도움이 되었다.

중3 되던 해에 이곳 시골 춘천에서도 FM 스테레오 방송이 처음 송출되었다.
조그만 인켈 휴대용 카세트라디오에서 나오는 스테레오음은 내 인생에 충격과 함께
결심의 한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로 올라갈 때가 되었다.
집에서는 공고가서 졸업해 취업해서 니가 알아서 먹고 살아라 하는 식이었다.
이만큼 키워줬으니 고마운 마음으로 독립하라는 말씀이다.
나는 좋았다. 그만큼 내가 하고싶은 일을 배워 빨리 집에서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담임 선생님이 의아해 하신다.
공고는 보통 점수가 밑에서 30% 정도 되는 애들만 가는 학교라는 것이 의례였기 때문이다.
그냥 원서를 썼다.
그날밤 큰누나에게 무지 맞았다.
큰누나는 고등학교 장학생으로 졸업했지만 딸은 시집이나 가라는 아버지의 반대로 대학의
꿈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 집을 나가 무일푼으로 서울교대를 장학생으로 입학해 친구
자취방에서 눈치보고 지내고 있었다.
누나가 울면서 때리는 것을 처음 봤다.
나중에 알았지만 돌아가신 어머니가 2년제 대학을 나와 4년제 정규대학을 못간 한이
있었는데 그래도 제일 오래 지낸 누나에게 꼭 4년제 대학을 가라고 하셨단다.
후에 큰누나는 초등학교 교사에 임용되었고 후에 어머니의 소원대로 4년제 서울외대
를 야간으로 들어가 졸업하고 지금은 결혼해 영국 런던에서 잘먹고 잘산다.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 필자는 향후 10년 계획을 세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독립을 해야 하는데 무일푼으로 집을 떠나는 것이 사실상 어렵기에
공군 하사관을 지원해 오디오를 더 배우고 직업군인으로 월급을 모아 자수성가의
초석으로 삼을 계획이었다.
결국 공군지원 시험을 두 번이나 봤지만 300대 1이라는 경쟁을 뚫기 어려웠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시험보기 전에 이미 합격자들은 따로 있었다.

고등학교 3년의 세월은 그야말로 전성기였다.


[고등학교 졸업사진]

당시 전자를 가르치던 선생님은 필자 때문에 욕 많이 보셨다.
수업만 끝나면 조르르 과사무실로 쫒아가 오디오에 대한 질문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최귀손 선생님...
나의 첫 오디오 스승님이 되어주셨다.
주말만 되면 성북행 세시 비둘기호 열차에는 항상 필자의 몸뚱아리가 있었다.
당근 목적지는 세운상가.
그때 저승으로 갔던 독수리표 전축에 현대식 사운드 메타도 달고 앰프부도 현대식으로
탑재해 새로운 앰프로 부활했다.
춘천의 전파사들을 돌며 반 버려진 리시버앰프들의 케이스를 싸게 구해 세운상가에서
구입한 부품들로 새로운 앰프로 탄생시키곤 했는데 그때 경쟁이 되던 앰프는 국산 앰프들...
인켈, 태광, 아남, 롯데파이오니어......
필자가 만든 앰프의 사운드와 비교하기 위하여 이 세 대리점은 필자의 안방이 되어버렸고
악성손님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소오스는 오로지 턴테이블....
CDP가 나오기 전이었다. 그래서 모든 앰프에서 포노앰프의 첨가는 필수였고 퀄리티를
높이기 위한 포노앰프도 수많이 만들었다.
드디어 고3때 흡족한 미소로 인켈 대리점을 나왔다.


[고2때 완성한 컴퍼넌트. 앰프, 튜너, 스피커, 턴테이블 까지 모두 만든것임]


3, 독립선언.

고등학교 졸업후 금성 대리점을 거쳐 2년간 사립고등학교 방송실 기사로 근무했다.
이때의 오디오 생활도 재미있었는데 모두 쓰려면 아마 서버가 다운될 것 같아 줄인다.
공군 하사관 시험을 두 번째 치르고 얼마 되지않아 육군에서 영장이 날라왔다.
공군하사관의 꿈이 날라가는 순간이다.
논산 훈년소에 입대후 육군 하사관이라도 가야 한다는 생각에 지원을 했다.
하지만 소식이 빨리 오지 않았다.
자대에서 일병계급장을 달고서야 전출명령서가 날라왔다.
그동안 하사관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속내용을 모르는 고참들에게 이상한
눈초리 받고 왕따 당하고..... 어이! 최하사님....최하사님.... 하며 비아냥 거리는
고참들도 있었다.
그를 뒤로하고 3군단을 거쳐 김해의 공병학교로 향했다.
공병학교의 하사관 교육 6개월은 생지옥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자대배치를 받았다.
양평.....
군대에서의 첫 월급은 십오만천백원.....
아직 잊지 않는다.
여기서 5년을 더 지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필자의 운명이니......
피하지 않고 즐기기로 했다.
월급의 60%를 적금에 들었다.
제대후 월세자금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부품과 오디오 연구비에 들어갔다.
운좋게 오디오에 푹 빠진 말년병장이 있었는데 이 친구가 제대후 부품수급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일직근무날이면 출근때 아예 공구가방을 챙겨 부대에서 근무하면서 작업을 했다.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부대에서 작업을 하면 병사들이 쓰레기를 다 치워주기 때문에
필자의 자취방이 더렵혀 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오디오 잡지사에 글을 쓰기 시작했고 소정의 원고료(처음엔 현찰로 주더니
후에는 책자 소개용 LP로 교체)를 받았다.
책자에 필자의 글들이 소개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편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많은 격려와 칭찬의 글들.....
대학 교수님부터 학생까지 다양한 계층에서 가리지 않고 왔다.
그래서 우리 부대에서는 유명인사로 통했고 간부들의 오디오 관리맨 활동도 해야했다.
공병부대는 비가 오면 내무교육이다.
차트는 공병과제가 들어오지만 병사를 앉혀놓고 고리타분한 주특기 훈련을 교육하면
50%는 존다.
그래서 오디오 교육을 시킨다.(이거 국방부에서 알면 큰일인데.....)
조는 병사는 없다. 질문도 많이 들어온다......제일 행복한 순간이다.

체육대회날이면 우리중대 오디오가 제일 빵빵할 수 밖에 없다.
소리로 기를 죽인다.

4, 이론과 실체

군생활이 순탄하지만 않았다.
싸이코 같은 중대장이 부임해 왔고 그로 인하여 많은 병사들이 시달렸고
필자 또한 담배를 입에 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싸이코 중대장의 특징은 한마디로 딸랑딸랑 이다.
즉, 자신의 출세를 위해 대대장에게 갖은 아양과 함께 다른 중대에서 외면하는
무모한 임무를 도맡았고 그로 인해 중대원은 간부 사병 할 것 없이 엄청 시달려야 했다.
휴가는 물론 없었고 휴일도 없었다.
사단 하사관 사격대회에서 준우승을 하여 3박 4일의 사단장 휴가를 받았는데
투스타가 준 휴가증을 대위가 찢어버린다.
사병들 보는 앞에서 간부들 뺨 때리는 일부터 시작하여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인간으로써 도저히 이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한달짜리 야외훈련중에 자대에서 위문공연차 대대 간부들이 오는 전날밤
몰래 다찌차를 몰고 근처 민간인 휴양소에서 의자며, 파라솔 등을 훔쳐와
대대장에게 준비성에 대한 자랑을 하기도 했다.
인과응보라 했던가....
그짓이 너무 심하자 대대장 조차 그를 외면하기 시작했고 허리병이 돋아
결국 군복을 벗게 되었다.
그가 부대를 떠나는 날에 한명도 그를 배웅해 주지 않았다.
권** 대위.
지금쯤은 잘 지내고 있을까......


[사단장 표창]

이 중대장에게 시달릴 무렵 시간을 쪼개 앰프 연구하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퇴근시간이 보통 매일 밤 10시에서 늦으면 새벽까지 작업을 했는데
위병중사 근무를 스는 날이 나에겐 휴일이었다.
대대장의 특별지시로 근무자는 중대 작업을 하지 말라는 고마운 명령이다.
그때 한창 연구하던 것이 이론과 실체다.
과연 좋은 회로와 최고급 부품을 사용해 앰프를 만들면 하이엔드 소리가
나올것인가....
그래서 최고의 부품으로 앰프를 몇대 만들었다.
저항 하나도 알파메탈라이즈 금속피막 저항으로 값이 무려 하나에 1만원이
넘는다.
참고로 일반 금속피막 저항은 10원도 하지 않았다.
이 알파메탈라이즈 금속피막 저항은 온도특성이 뛰어나며 정밀 전자저울용으로
쓰여진다.
특히 전원부에 신경을 많이 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무모할 정도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모든 부품은 컴퓨터 그레이드급 이상이 쓰여졌고 전해콘덴서는 미군용 규격인
스프라그나 멜라리가 아니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 무렵에 들어간 부품 비용이 그동안 앰프를 만들던 비용의 몇배가 넘었다.
하지만 의외로 결과는 달랐다.
비교를 위해 일반 부품들로 구성된 앰프를 똑같이 만들었는데 결과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표현은 심리적 기대심이 한몫 했다.
제 3자의 입장으로 보면 차이점을 못느낄 정도다.
이후 수입상에 근무하면서 그 결과의 이유에 대해 알았고 그 내용은 후에 이어진다.

오디오 책자를 보고 낯선 사람이 면회를 왔다.
에스페로를 타고 양동근이 들고다니던 무지하게 큰 휴대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다.
명함에는 서울 여의도동 **빌딩 **통상.....
이 수입상에서 차후 필자가 근무하게 될줄은 몰랐다.

군대생활.....

600여명의 병사들을 신병부터 제대할 때 까지 관리했다.
그 중에는 불의의 사고로 생을 다한 친구들도 있었고 애인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어
고생하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제일 비극적인 사건이라면 훈련중 화재사고로 저세상으로
간 친구의 장례식 날에 자세한 소식을 듣지 못한 애인이 좀 다쳤다고만 알고 면회를
왔던 일이다.
그녀가 슬피 우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위병소 앞에서...]


[지금은 사라진 팀스프리트 훈련]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적금탈 일이 임박할 정도로 군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야말로 황금같은 20대를 국가에 바쳤던 것이다.
적금을 탔다.
당시로써는 제법 큰 29인치 TV를 샀다.
금성에서 나온 돌비 프로로직 프로센서가 내장된 한국 최초이자 최후의 TV이다.
10여년전 당시 가격이 120만원 가까이 된다.
그리고 그에 걸맞는 7헤드 하이파이 비디오도 샀다. 이놈도 80여만원이나 줬다.
친구놈이 금성에 있었기에 회로도도 같이 얻었다.
이때가 필자의 첫 AV시스템을 갖추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메인 스피커인 KEF 105.3 레퍼런스 스피커가 들어왔다.
이 세 기계는 20대를 국가에 헌납한 대가의 부산물이다.
이 시스템으로 한달여 음악과 영화를 보았는데 슬슬 끼가 발동되어 TV와 VTR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회로도가 있어 작업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는데 부품값이 만만치 않게 들어갔다.
먼저 오디오 신호부의 개조가 시작되었고 후에 비디오 신호부도 작업을 맞췄다.
개조후 TV와 VTR의 내부를 보니 무슨 하이엔드 기기같다.
이때 관심부는 비디오 신호부의 부품교체후 화질이 얼마나 좋아질까 였는데
결과는 예상보다 컸다.
탈랜트 얼굴이 클로우즈업 되었을 때 거짓말 조금 보태 모공까지 보인다.
피부가 자세히 나타나니 그 탈랜트의 피로도 까지 알 수 있을 정도다.
두 번째로 변한 것이 색상이다.
적색이 드디어 적색으로 보인다.
원색이 모두 또렷하다.
오디오 신호보다 눈으로 보이는 비디오 신호가 개조결과 효과가 더 크다.
개조후 [어비스]란 영화를 봤는데 왠만한 극장보다 화질과 사운드가 좋다.
그때 당시는 테입으로 음악을 많이 듣고 녹음을 했는데 하이파이 비디오에
음악을 녹음해 보고 놀랐다.
음악녹음 같은 경우 기존의 비디오는 트랙의 일부분을 아날로그식으로 해서
녹음을 했는데 새로운 방식은 심층기록 방식이라 하여 얇은 두께의 테입 상층을
오디오신호 트랙으로 만들어 DAT와 같은 방식으로 녹음된다.
거기에 개조까지 끝내다 보니 녹음 수준이 릴덱 수준보다도 높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2002년 부터 TV 브라운관 수명 점점 다해갔다.
너무 정이간 TV라 브라운관을 교체하려고 했다.
주변에서는 그 값이면 새 TV를 살수 있다고 했지만 나에겐 역사적인 물건이다.
나와 그동안 희노애락을 같이 했다.
A/S센타에 연락을 해보니 그 모델의 브라운관이 없고 있어도 무지 비싸다 한다.
그래도 알아봐 달라고 했다.
결국 전국망을 통해 알아봐도 브라운관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LG SD급 디지털 TV를 들였는데 화질이 많이 떨어진다.
하지만 옛날 TV는 눈물을 머금고 퇴출해야 했다.

5, 희망과 절망.

사단 사령부에 군인신분증을 제출했다.
6년여간의 군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행사다.
많은 병사들을 맞이하고 제대 시켰지만 필자에게도 제대라는 일이 있을지
예상하지 못했다.
꿈만같다.
사령부에 소문으로만 듣던 여군장교 두명이 있었다.
참, 군대 좋아졌네....

한달간의 전역휴가를 받았다.
이후 하루만 전역식 하러 부대에 갔다오면 끝이다.
춘천엘 처음 갔을때는 이미 집이 이사해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알아보고 나서야 집을 찿았다.
전화번호도 바뀌고......
그렇게 떠나고 싶어했던 집이지만 당장은 다시 들어와야 한다.
먼저 양평에 있던 자취방에서 집으로 이사를 했다.
그동안 짐도 많이 늘었다.
춘천집은 27평짜리 아파트 였는데 후에 알았지만 이 집도 아버지의
증권 때문에 이미 은행 담보로 들어가 있었다.

취직을 위해 서울로 갔다.
군대 있을 때 부품조달 해주던 신림동 친구(전**)부터 만나고 처음 찿아간 곳이
의정부에 있는 인켈이었다.
사회경험이 별로 없던 필자에게는 이력서 들고 회사가서 신청하면 되는줄 알았다.
하지만 회사 수위아저씨는 이력서를 보지도 않고 문전박대 한다.
한마디로 사람 안뽑는 단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두 번째로 찾아간 곳이 태광, 샤프, 롯데 등 이었는데 역시 모두 문전박대다.
회사에서 수위 아저씨께 특별 인사권을 준 것 같다.
앞이 깜깜 했다.
아직 이 사회는 실력보다 학력을 보는가.....
예전에 누나가 왜 그렇게 때렸는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그때 누가가 했던 말 중에 하나가 생각난다.
" 야...거지도 요즘 대학나와"

일단 춘천에 취직을 했다 .
9월에 전역해 다음해 3월까지 있었으니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 업체는 전자제품 하청업체로 별에 별걸 다 만든다.
카오디오부터 무전기, 라디오, 산업기기 까지.....
짧은 기간이였지만 필자는 많은 경험을 했다.
제품이 어떤 라인을 거쳐 완성되는지, 그리고 그 시장조직과 영업방식 등.

작업반장을 했다.
라인을 설정하는 중요 임무다.
즉, 저항을 잘 꼽는 아줌마 한테는 몇번째 라인자리를 주고 땜을 잘하는 아줌마
한테는 몇 번째 라인자리를 주고....
최대한 빠른 공정과 불량률을 낮춰야 한다.
박봉에 일은 많았지만 새로운 경험을 해주기에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디핑이니 인써트니, 하네스니 이런 새로운 용어와 대형 조립기기를 다루는
기술도 배웠다.
이제는 거꾸로 되어 필자가 하청을 주는 입장이 되다보니 그 전자산업쪽에 종사하시는
분들의 애환을 아는터라 가슴이 아프다. 그쪽 분야의 인건비는 아직도 매우 싸다.

춘천에 있으면서 3월 말에 아는 카페에서 앰프 발표회를 했다.
여기서 예전에 이외수 형님도 만나고 신촌부르스의 한영애도 만났다.
연애인들의 휴식처다.
가끔 라이브도 하는 이 카페는 춘천 외곽지대에 있어 사람이 많지 않다.
KEF를 드라이브 하기 위해 만들었던 앰프다.
이리저리 홍보를 했지만 역시 시골은 시골이다.
춘천 사람들 보다 서울 사람들이 더 많이 왔다.
그 중에는 군대 있을 때 면회를 왔던 **통상 *부장님도 오셨다.
그 다음날 007가방에 옷가지 몇 개를 챙기고 *부장님 차에 몸을 싣는다.

6. 새로운 경험.

밤이 되야 서울에 도착했다.
잠잘곳이 없다.
일단 *부장 자택 가까운 여인숙에 머물렀다.
이 여인숙에 일주일간을 머무르고 결혼한지 몇 달 않되는 성북동 큰누나네 집에
신세를 지내게 된다.
첫 출근은 촌놈처럼 지리를 몰라 엄청 헤맸다.
그래서 첫 출근부터 30여분 지각을 했다.
오디오와 음반을 같이 취급했던 수입상인데 여직원 두명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미스한과 미스김......
나중에 미스한은 앞 사무실 직원과 눈이 맞아 결혼했지만 미스김은 지금 뭐하고
지내는지 궁금하다.
어쨌든 첫날은 참 어색한 분위기로 뭐부터 해야할지 몰랐는데 어디선가 히한하게
생긴 스피커에서 희한한 아프리카 원주민의 음악이 나온다.
자리가 좁아 스피커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타악기의 음색에 놀랐다.
그런류의 소리는 처음 들어본다.
그 스피커가 지금 공구하는 VISATON 슈퍼트위터가 들어가는 MONITOR 890이었다.
앰프는 릭크 진공관 앰프.....
CDP는 재미있게도 어울리지 않는 보급형 5CD 체인저.....
세계 각국에서 새로운 음반이 나오면 샘플로 하나씩 보내주는데 지금 나오는 음악은
아프리카에서 온 샘플 음반이다.
보통 하루에 한두장씩은 CD가 들어오는데 그야말로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따끈따끈한
음악을 매일 들어보는 직업이 어디 있을까....
그 음반들 중에 한때 힛트쳤던 람바다도 있었다.
그거 잡았으면 대박 이었는데 아쉽게도 다른 업체에서 가져가 큰 것을 놓쳤다.
스타카토, 쉐필드, 레퍼런스 레코딩(RR), 델로스 등 언더메이저로 음질이나 음악성을
중시하는 브랜드가 많았다.
그중에서 쉐필드에서 나온 오디오 테스트용 LP가 있었는데 포장을 너무 완벽하게
해놔서 결국 끝까지 들어보지 못했다.
수입상에서의 첫 근무는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오디오 세계를 느끼게 해주는
첫 신호였다.

7, 베일이 벗겨지며.....

당시 자사에서 취급하던 하드웨어는 썩덴, NHT, CEC, 로텔, AMC, 베메스터, 소타,
비자톤, 아카펠라, 샤크, 캠브리지오디오 등 종류가 많았는데 정작 자사에서는 국내
브랜드 제품을 수출하는데 주력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방 국내 업체와의 미팅을 위하여 지방출장이 잦았다.
그 즈음에 광우전자에서 진공관 앰프를 처음 선보이는 자리를 맞아 해외 마케팅의
가능성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공장이 있는 경남 양산으로 향했다.
원래 광우전자는 삼성전관에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였다.
공장에 도착하자 사장님 이하 간부들과 개발자들이 엄숙한 분위기로 회의장에 모여 있었다.
앰프의 가능성 여부에 대한 검증은 그 자리에서 사장님과 개발실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필자가 직접했다.
윌리엄슨 회로를 썼다는데 뭔가 특별한 점이나 신기술은 보이지 않았지만
오디오계에 처음 발을 들여놓는 신진 업체치고 내부 구조나 전반적인 디지인은 썩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부품설정등 몇가지 수정사항을 알려주고 시청실로 향했다.
당시 소리는 진공관적도 아니고 TR쪽도 아닌, 좋게 말하면 중용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소리의 색깔, 개성이 없었다.
외국에서 먹히려면 소리가 좋던가, 아니면 디자인이 뛰아나던가 해야 한다.
물론 브랜드 네임이 어느정도 알려진 후라는 전제조건이 붙는다.
광우전자를 떠나고 몇번의 미팅이 더 있었는데 우리쪽의 기준에 못미쳐 수출성공은
못했다.
그때 이 제품이 나중에 몇번의 수정을 거쳐 태어난 KI - 40W 이었다.

그리고 또하나의 국내 진공관앰프 브랜드인 오디오 ** 가 있었다.
이 회사 제품의 디자인은 당시로써는 수입품으로 착각할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남들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참신한 디자인으로 세인의 관심을 모았다.
회로동작의 안정성 여부는 시간관계상 검증하지 못했지만 사운드 자체는 어필할만 했다.
그래서 일단 샘플 앰프를 대만으로 보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소리를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나중에 사유를 알아보니 운송과정에 트랜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트랜스와 본체 사이가
찢어져 버렸던 것이다.
즉, 내구성에서 낙제점을 받아 이 제품 또한 수출문턱을 넘지 못했다.

그리고 후에 다른 브랜드 몇가지도 조사를 해봤는데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자금이 없는 브랜드는 수출이 어렵고 자본이 있는 브랜드는 자력으로도 수출이
가능하다는...
절벽을 오를 때 발을 헛딪어 매달려 있을 때 힘이 남아 있으면 다시 오를 수 있고
힘이 없으면 밑으로 떨어진다는 당연한 결과다.
그만큼 한 제품을 수출하는데 있어서는 자본은 기본이고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많은 여건이 필요하다 라는 것을 알았다.

수입상 근무하면서 참 일은 많이 했다.
수입 통관작업은 기본이고 통관시 문제가 생기면 담당자 만나 사정사정해 문제 해결하고
고객관리, 재고관리, 영업, 판매, 전기용품 형식승인 작업, A/S, 신제품들의 시장성 조사,
광고, 거래처 관리.....등등.....
왜냐하면 직원이 필자 하나였기 때문이다.
여직원들은 음반파트라 하드쪽엔 관여하지 않는다.
당시 앞사무실 남직원과 눈이 맞아 *부장님만 자리를 뜨면 쪼르르 앞사무실로 놀러가
그쪽 사무실일 도와준다.
한술 더해 * 부장님 들어오시면 알려 달란다. (*부장님이 결국 사장님이다)
하드쪽에 직원이 새로 들어와도 한달을 버티지 못한다.
군대 있을때도 직속 쫄따구를 중사 말년에 면회했는데 사회생활도 마찬가지다.

하여간 그 일들중 하나가 용산 수입수리점에서 수리를 못하는 기기를 살려주는 일이다.
보통 거래처 대리점에서 그런 부탁을 많이 하는데 외면할 수가 없다.
그리고 *부장님도 그런 일을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을 은근히 과시하는 느낌도 있었다.
스펙트럴부터 마크레빈슨, 골드문트, 그리고 자사 취급 모델까지.......
이런 제품들을 수리하면서 놀란 것이 있다.
모델마다 다소 차이는 있었지만 트릭을 쓴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단가를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한 트릭이었으며 이는 소비자를
속이는 행동과도 같다.
크롬 도금된 번쩍거리는 캡이 있어 열어봤더니 대만산 전해콘덴서(비싸야 500원 짜리)
가 들어있고 50원짜리 스파크킬러를 몰딩으로 그럴싸 하게 만들어 이 부품을
수리부품으로 30만원에 판매하던가, 앰프부를 모두 몰딩처리해서 내부에 뭐가 들어가는지
보이지 않게 한 제품은 분해해 보니 정말 허접한 부품들이 들어있고.....
2~300만원대 제품에서 이런 것이 보인다면 말 않한다.
보통 1000만원이 넘는 제품들이 대부분이다.
즉, 부품이 보이면 단가가 나오기 때문에 이를 숨기기 위해 이런 짓을 한다.
g사 앰프는 이런 것을 자사의 특허라고 말을 살짝 돌려 소비자를 그럴싸 하게 속인다.
그 결과를 공개한다.
소리의 퀄리티나 가격을 떠나서 물량투입을 많이 한 순서로 열서해 본다.
1, 마크레빈슨/마드리갈
2, 매킨토쉬, 소닉 프론티어, 아큐페이즈
3, 크렐
4, 스펙트럴
5, 스레숄드, 코다, 첼로, 클라세
6, 골드문트, 오디오 리서치, 제프로렌드
7, FM 어커스틱

이 밖에도 많이 있지만 많이 알려진 제품순으로 하면 대충 이렇다.

필자는 이런 앰프들을 많이 봐왔고 뜯어봤고 원리를 다 알기에 별로 흥미가 없다.
더 흥미로운 일은 유럽 중소 오디오 업체에서 만들어진 제품을 관찰하는 것이다.
*부장님은 세계에 발이 넓다. 마당발이다.
해외 출장을 다녀오면 완성기는 통관문제로 못들여 오지만 각종 기판을 샘플로 들여오는데
정말 참신한 아이디어가 많다.
원래는 여기서 효자노릇할 제품을 찾아내는 것이 주 임무이지만 필자는 이것을 연구하고
갖고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오디오는 빙산의 일각이다. 그리고 우물안의 개구리다.
스테레오 파일에 돈이 약간 모자라 B등급 받은 제품을 구해 흡족하게 사용하는게
우리네 오디오 생활이다.
그런데 코쟁이들도 오디오 하는거 보면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다.
이런면으로 볼 때 자작이 체계적으로 활성화 되어있는 일본이나 대만이 부럽다.
영국에서 들여온 포노앰프 기판이 있었다.
진공관과 TR을 같이 쓰는 하이브리드 방식이었는데 이 회로 이해하느랴 죽는줄 알았다.
기존의 전자공학 상식을 뒤집는 회로였기 때문이다.
커플링 콘덴서 대신 다이오우드를 사용하고 입력을 컬렉터로 넣고.....
결국 소리를 만들려는 이유에서 이런 아이디어들이 나왔다.
이런 기억이 난다.
수입상 근무할 때 필자가 어느 지인께 앰프를 만들어 드렸는데 나중에 시정수 계산 실수로
주파수 특성이 15KHz 까지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가져와 원래대로 25KHz까지 재생하게 고쳐줬는데 전화가 왔다.
옛날 소리가 더 좋으니 처음대로 다시 바꿔달라 하신다.
이때부터 소비자들이 생각하는 오디오관을 알기 위해 심리학 공부를 시작했다.
군대있을 때 연구했던 것이 기억난다.
이론과 실체는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들은 오디오를 소리가 아닌 디자인과 브랜드로 구입한다는 것을....

이제 더 이상 이곳에서 배울것이 없었다.
이때부터 슬슬 필자 브랜드의 앰프를 만들고 싶어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앰프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거품없는 가격으로 다른건 몰라도 앰프만은 사람들이 맘 편하게 음악생활 하는데
도움을 주고 싶었다.




[수입상 근무당시 독일 비자톤 부품으로 만든 스피커/우퍼 내장형]

8, 새로운 도전.

수입상 근무당시 필자의 월급이 용산 전자랜드에서 청소하고 상담하는 점원의
월급보다도 적었다.
그 점원이 필자의 후배였고 그 사실은 늦게 알았다.
사실 필자가 배운 것으로 비했을때 월급의 많고 적음은 상관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직서를 제출할 이유가 필요했다.

처음 사업은 자금관계상 동업형식으로 시작했다.
한사람은 자금을 대고 필자는 영업과 기술력을 지원했다.
그때 삐삐를 처음 구입했다.
샤크 브랜드를 취급했다.
먼저 있던 수입상에서 영업권을 따올 수 있었다.
각종 케이블과 오디오 악세사리 등이 있었는데 처음엔 굉장히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사업이란게 그리 쉬운가.....
납품은 되고 결재는 없다.
재투자, 즉 재수입을 자금에 대한 한계점에 닿았다.
이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앰프를 만든다. 이것이 최초 필자의 앰프다.
하지만 투자자가 앰프마진에 대한 의견이 맞지 않아 둘은 갈라서게 되며
소리사이란 브랜드로 독립하게 된다.




[나무프리에 뒤를 이어 만든 소리사이 프리앰프 2호기 기판]

9, IMF

그 앰프를 상용화 시킨 것이 INT 50.2 라는 제품이다.
이때가 IMF 최고조였고 정신적으로 금전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하이텔 하이파이 사랑방 동호회원님들께 생활비를 보조받기도 했다.
바닥을 친다고들 많이 이야기 하지만 필자는 FM으로 바닥을 쳤다.
능력없으면 끊으라고 했던가.... 구름과자..... 정말 정답이다.
하지만 말리면 더 하고싶은 것이 사람의 심리.
밥은 굶어도 담배는 펴야 했는데 눈덮인 추운 겨울 어디서 담배를 구하나.....
일단 밖으로 나갔다.
눈이 없는곳을 발견했다.
방금 출발한 듯한 주차장 차량 밑이다.
그곳에는 꼭 꽁초 한두개씩은 있다.
퇴근시간대를 잘 맞춰야 한다.
운좋으면 장초도 몇 개 구한다.
끼니는 아는 분들이 도와준 라면으로 해결하는데 라면 한 개로 하루를 버틴다.
점심때 라면 반쪽, 밤 12시 쯤에 반쪽,....
이때 소원이 라면 두 개 한꺼번에 끓여먹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방세가 밀려 2년치를 밀렸는데 겨우겨우 해서 1년치 가량은 후에 갚았다.
그래도 내쫒지 않는 주인아저씨가 무척 고맙다.
INT 50.2 인티앰프는 만드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고 마진이 없어 5호기 출시후 단종된다.
그리고 이 앰프를 기본으로한 파워앰프를 만드는데 이것이 대박을 쳤다.
바로 POW 100.2 파워앰프다.
하지만 역시 제작시간이 길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때는 샤시까지 스스로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정말 쌩노가다가 따로 없었다.
자금만 있으면야 뭘 못하겠는가....
예전에 소비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던 앰프 만드는 작업과는 그 차원이 달랐다.
한달에 한 대 만들었는데 주문이 9개월(9대)치 까지 밀린적이 있었다.
한달에 한 대 팔리면 인건비 포함해 마진이 60만원 정도.
생활비 빼면 재투자할 비용이 남지 않는다.
예전 수입상 사장님이 수입 오디오 가격은 다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야 라는 말이
생각났다.
이런저런 스트레스로 꿈을 많이 꿨다.
돈이 없어 필자는 군대에 다시 입대해서 열심히 일했는데 월급이 나오지 않는다.
매월 10일이면 국민은행 통장으로 들어오던 월급이 없다.
대대 행정과 선임하사를 찾아가서 정식으로 입대 된 것 맞냐고 확인해 달라고 하는데
그냥 웃으면서 며칠 더 기다려 보란다.
다음달에도 월급이 들어오지 않고 그 다음달에도 월급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다 놀래 깨보면 꿈이다.
차라리 계속 꿈속에서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결국 POW 100.2 18호기를 마지막으로 단종되고 리비도 MK2라는 모델로 업버젼 되어
새로 탄생한다.
모델 업버젼의 의미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몸부림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돈이 돈을 번다는 생각과 소비자의 마음으로
그동안 갈고닦은 기술로 거품없는 앰프를 만들었는데 반대세력에
의해 내 자식이나 다름없는 앰프가 품질격하의 소문이 퍼질때면 배신감 까지 들게 한다.

10, 새로운 출발.

한 선배의 도움을 받아 시청실을 오픈하게 된다.
그 선배와의 생활 역시 자금사정으로 그리 오래가진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가장 재미있게 일할 때 같다.
여직원도 한명 두었다.
스카이라인 킷트가 한창 효자노릇을 할 시기였다.
산전수전을 다 겪다보니 이제 조금 사업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었다.
그 선배와 약 4개월 정도 지내면서 시청실이 있고 없는 차이가 얼마나 큰지 절실하게
느꼈다.
그해 말 레인보우가 나왔다.
역시 이상한 소문 때문에 초기에 고생을 좀 했지만 결국 지금보면 롱런을 하기위한
액땜으로 생각한다.
국산 인티앰프 치고 단일 기종으로 만 3년이 넘게 제작되고 유통되는 모델은 많지 않다.
필자는 레인보우가 10년 이상 롱런 하리라 믿기에 의구심이 없다.
그리고 분리형이 나왔다.
아직 충분한 자금사정이 되지못해 마케팅이 좀 모자르다.
하지만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는 자신감이 있기에 초초하게 생각치는 않는다.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는 일이 천성이 게으른 필자에게 놀랄정도다.
사람이 한번 바닥을 쳐보니 더 어려운 일이 벌어져도 여유가 생기나 보다.
더 여려워져 봤자 굶기밖에 더하겠느냐.
욕심을 버리는 여유가 생기니 필자의 앰프를 기다리는 많은 분들의 환한 얼굴이 들어온다.

감사합니다.







[스레숄트 4e와 리비도 파워앰프 비교시청회 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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